
복군 30년, 상전벽해가 된 기장군 공태도 전 부산시편입위원장 및 기장군 복군추진위원장 기장군 복군 이전의 상황과 1995년에 잃었던 기장군을 찾기까지의 험난했던 과정을 전 복군추진위원장 공태도 씨를 통해 살펴본다 동래군시대 1914년 3월 1일 경상남도 도령 제1호에 따라 1개군의 면적을 약 40평방리(里)로 하고 인구 1만 명 미만의 작은 군은 이웃 군에 합군 시켰는데 기장군도 여기에 해당되어 동래군에 편입되었다. 서기 757년 갑화양곡에서 기장현(군)으로 행세한 지 1,157여년 만에 기장고을은 폐지되었다. 1914년 이후 기장의 교육은 거의가 부산에 있는 학교에서 수업했으며 역사와 문화는 과거 동래부 또는 부산부 등 동일한 행정구로서 의식주와 풍속 그리고 경상도 사투리까지 같았다. 양산군시대 1973년 7월 1일 동래군에 편입되어 있던 기장군을 떼어 내어 이번에는 양산군에 아예 통합시켜 버렸다. 역사와 문화를 함께 해온 기장을 떼어내어 경남의 양산군에 통합시켜 놓으니 이 지역은 꼭 이방지대 같았다. 기장에서 양산까지 가려면 40km의 비포장도로를 이용했는데 하루에 왕복버스가 고작 한 대뿐이었다. 군청을 비롯한 교육청, 경찰서, 농협, 보건소 등 볼 일을 보려면 동해남부선 철도를 이용해 서면역에 내려 양산행 버스를 타고 갔다가 다시 오는 등 하루 종일 걸렸으며 게다가 교통비마저 엄청나게 들어갔다. 통합 후 지역 유지들이 동래군 부활운동을 편다고 하였으나 여의치 못했다. 1972년 기장읍내 곳곳에 세워져 있던 조선 때 비석 36기를 한 곳에 모아 오늘날 기장군의 중요문화유산으로 남긴 필자는 당시 비석에 기장현감, 기장군수 등의 금석문이 있는 것을 읽고 언젠가는 기장군을 찾아야만 되겠다고 다짐하고 했었다. 어떻게 하면 복군이 가능할까. 솔직히 말해서 이쪽 지역사람들은 과거 동래군이 있었다는 것은 알지만 기장군이 있었다는 것은 거의 모르고 있었다. 나 혼자만의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기장지역에 양산군의 출장소를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동부출장소 양산군 동부출장소를 설치하겠다는 선거공약의 하나로 하여 당선되어 국회 원내로 들어간 김동주의원은 내무위원회 야당간사로 활동하면서 1986년 11월 1일부로 기장지역에 동부출장소를 내무부조례로서 만들어 기장읍 청사 2층에서 개소식을 가졌다. 초대 소장에는 동래군 출신인 윤종진씨가 임명되었다. 이날 김동주의원은 필자에게 "선배님 원대로 출장소를 만들어 주었으니 복군은 선배님이 책임지고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복군추진위원회 출장소가 설치된 이듬해인 1987년 장안농협 회의실에서 동래(기장)군 복군추진위원 선출이 각 읍면 대표 5명씩으로 20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이튿날부터 기장 4개 읍면들의 복군에 따른 진정날인 운동이 벌어져 수개월 만에 2만1천여 명의 서명을 받아서 조태근위원의 승용차를 이용하여 창원 경남도청까지 가서 접수시켰다. 중앙지와 지방지까지 나서 복군운동을 도왔으며 주민들은 한결같이 동래(기장)군을 찾아야만 된다고 추진위원들을 격려해 주었다. 추진위 구성 2년만인 1989년 동부출장소 윤종진 소장은 5개 읍면 주민들의 생활의 고충을 상세하게 적어 경남지사에게 복군이 되어야만 된다는 주민동향보고를 올렸다. 경남지사는 윤소장의 의견과 그간 동부출장 소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제반사항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복군이 되어야만 된다는 그 타당성을 내무부장관에게 보고했다. 내무부는 동일한 행정구역의 구청과 경찰서등을 갈려면 해운대 동래 금정구청 앞을 지나서 가는 것은 행정구역이 잘못됐다고 하면서 복군을 위해 마지막으로 여당 쪽과 당정협의회를 했는데 안타깝게도 부결되고 말았다. 이유는 기장 쪽 김동주 의원이 야당인데다 이를 추진하는 사람들이 저를 비롯 야당성이 강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장읍에 사는 한심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신발끈을 다시 매고서 활동에 들어갔다. 1990년 들어 저를 비롯 장자줄, 조명기, 이재종 부위원장과 장석봉 간사는 김동주 의원의 안내를 받아서 내무부지방행정국장(김영환)과 총무과장 박재영씨(기장,대변출신)를 만나서 현재 출장소 3과 8계는 너무 적어 늘어나는 민원에 대처할 수 없다고 기구 확대 요청을 했는데 그해 8월 10일 7과 27계로 군 규모의 기구로 개편됐다. 이는 김동주의원의 노력에서 이루어졌다. 나오연의원과 복군공약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출마한 민자당 나오연 후보가 협조요청을 해왔는데 복군공약을 발표 해 주시면 우리들도 돕겠다고 했다. 나후보는 당선이 소망이었고 나는 89년도에 여당위원장을 만나지 못해 좌절된 것을 후회하면서 복군공약을 요구 했는데 이를 공약으로 발표해 주었다. 나오연씨는 예상외로 많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서 원내로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1993년 6월 국회의장에게 복군에 따른 청원서를 내어 달라고 요청해 와서 추진위에서는 차동엽고문님을 비롯해 200명의 주민날인을 받아서 7월 9일 저를 비롯 정석봉간사 그리고 김동수지역부위원장과 함께 국회를 방문하여 나오연의원의 소개로 국회의장께 전달했다. 7월 14일 국회의장은 우리들이 보낸 복군에 따른 청원서를 국회내무위원회에 회부했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이 청원서는 국회 내무 위원회에서 가결되어 내무부에 넘어갔는데 이제 정부 발표만 남겨놓고 있었다. 부산시 편입 부결 1994년 8월 기장읍 등 5개 읍면 부산시 편입에 따른 시의회서 진정서는 부결되었다. 개발제한구역에서 풀려있는 정관면을 시로 편입시키기 위해 학군제 변경에 따른 학교신축과 상수도 시설연장, 버스종점연장, 그리고 행정시설비 등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 데다 고리원전의 핵폐기물 저장고 문제가 시끄러운데 있었다. 부산시의회서 부결된 마당에서 추진위원장인 나로서는 절망이었다. 김운환 의원을 만나다 당시 부산일보기자의 신분으로 있던 나는 이를 어떻게 뚫고 나갈까 하고서 밤잠을 설치고 있다가 생각해 낸 것이 집권당의 실력자였던 김운환 의원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울산사람으로서 민자당 해운대, 기장지구당 위원장이었으며 부산시당위원장 그리고 전국조직책의 실세였던 인물이었다. 평소 저와 안면이 있는 부산여객버스 사장이었던 서석순씨와 동향이어서 서사장에게 부탁하여 김위원장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기장 5개 읍면의 경우 학군제가 부산 아닌 울산과 마산 쪽이어서 학생들을 가진 학부형들은 부산으로 위장전출을 하고 있으며 상수도시설이 없어 주민들의 생활고와 한 시간에 한 번쯤 다니는 버스 등을 지적하고 옛날부터 같은 행정구역에서 생활하던 부산으로 편입하는데 도와줄 것을 건의했는데 김위원장은 도와줄 것을 약속했었다. 불지핀, 시 편입운동 기장지역 5개 읍면의 학군제와 상수도 그리고 교통문제를 부산시와 비교할 때 꼭 이방인들이 겪는 생활고라는 문제가 중앙지를 비롯 부산일보 국제신문 등에 자주 게재되기 시작했다. 특히 부산매일신문 편집위원 겸 경남동부 본부장이었던 조태근 위원은 5단 이상의 글을 자주 게재하여 주민들을 대변하고 있었다. 때맞춰 기장이장단(단장 장무관)은 시편입의 결의문을 장안지역을 대표한 장석수, 신정렬씨 등 200여명의 건의서와, 철마면 정석대씨 외 200명 그리고 정관면 덕산리 이이재씨 등 전 이장들이 날인한 시편입에 따른 진정서가 부산시에 전달됐다. 부산시편입 투표율 80% 찬성 정부는 기장 5개 읍면민들의 도농통합문제와 일부 사람들이 부산시 편입을 반대하고 있다는 여론에 따라 10월 1일 투표를 실시했는데 찬성 11,818, 반대 2,988 무표 195로 압도적으로 시편입에 찬성했다. 부산시의회서 가결 8월 의회에서 부결된 기장 5개 읍면의 시편입이 다시 상정되어 10월 의회에서 가결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또 있었다. 그것은 경남출신국회의원으로 구성돼 있는 경남의정회서는 당시 대두되고 있던 울산광역시 승격 문제 등에 제동을 걸었다. 그것은 경남도의 예산이 부족한데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 독립되면 세입 등에 큰 차질이 있다면서 거부하고 있었다. 기장 5개 읍면에서 부산시로 편입하려고 해도 경남의정회 국회의원들이 거부하면 무산될 위기에 처해있었다. 울산광역시 승격과 함께 의정회서 승인 나 의원은 경남도 의정회 회장이었던 김봉조의원(거제출신)과 박관용 대통령비서실장을 수차례나 만나 설득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11월 들어 경남도 국회의원 모임인 의정회서 박관용 대통령비서실장은 울산광역시의 문제는 김영삼대통령의 선거공약이라고 설명했었다. 이어서 나오연의원의 선거공약인 복군과 편입도 함께 처리해 줄 것을 의원들을 설득시켜 마침내 울산광역시 승격과 함께 승인되었다. 기장군 개청 행사 1995년 3월 3일 기장군청 임시청사(동부출장소)에서 최형우장관을 비롯 나오연 국회의원과 김기재 부산광역시장 등 많은 지역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개청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필자(공태도 복군 및 부산시 편입추진 위원장)는 국회에다 청원서를 내는 등 부산시 편입에 많은 공적을 남긴 나오연 의원께 감사패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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